본문 바로가기
books

데미안 :: Demian

by heesangs 2021. 3. 2.

데미안

Demian

난 왜 이 책을 리뷰하게 되었을까? 

워낙 유명한 책이라 핸드북으로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이 다시금 나의 철학적 사고에, 본질적 사고에, 윤리적 사고에

불빛을 들여다 주었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다. 

성경을 읽으며 철학을 멀리하게 된 것도 있지만 생각의 부지런함을 

다시 일깨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가슴 설레기도 한다. 

 

단순한 소설로 치부해버리기엔 좋은 내용들이 너무 많이 들어있는 책이다. 

생각하고 질문하고 나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읽을 것이기 때문에

완독 하는데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리뷰는.

주요 대목들을 간단히 적어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형태로.

리뷰를 진행하겠다.


데.미.안.

책 이름은 데미안이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싱클레어. 

데미안은 주인공이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싱클레어는 부유하고 안정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동시에 빈민가와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그중 학교생활을 하던 중, 데미안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와 많은 대화를 하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삶의 관점과 완전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그의 내적인 변화로 때론 세상에 저항하기도

그리고 때론 방황하기도 한다. 

 

한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데미안이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는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것은 데미안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싱클레어의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주요 대목

"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싱클레어를 향해 한 말>

나도 여기서 한방 먹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잊고 살아간다. 누가 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고 쉽게 합리화하기도 하고 욕망에 쉽게 타협하기도 한다. 데미안의 이러한 말은.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신이 되겠지만
일반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도덕적 양심.
철학적 관점으로 본다면 칸트의 실천이성쯤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잊고 살아가는 것을 잊지 않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방탕아와 성자라는 표현을 통해 

"삶에 대한 충동, 순수함에 대한 욕구, 성스러움에 대한 동경"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
그것은 서로 대치되어 있으며 (삶의 충동 ↔︎ 성스러움의 동경) 하나를 선택하는 동시에 하나를 선택할 수 없음이 아니라.
모순이라는 형태로 둘 모두를 취할 수 있는 개념인 것이다. 특히 "순수함에 대한 욕구"는 
그 중간에서 어떠한 모습도 선택할 수 있는 아주 절대적인 힘을 가진 녀석.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알은 새의 세상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알을 깨야 한다. 

새는 곧 신으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여기서의 신은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 형태의 신이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장의 단계? 고통의 극복? 삶과 죽음?
확실한 것은 깨어지기 전에는 밖의 세상을 알 수 없고, 한 번 알을 깨면,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난 알을 깨기가 두려운 것인가? 
아프락사스. 플라톤의 이데아적 관점의 기독교사상을 깨고, 현대적 관점에서의 신을 재 해석한 것이다. 
현실세계에 선과 악이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진리이고 완벽함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완벽하다. 

 

내면의 생각으로 혼란을 겪던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가 불 앞에 앉아 명상하는 것을 보고

"어떤 형상을 세밀히 관찰하고 불합리해 보이며 난잡하고 괴상하게 느껴지는 자연현상에 몰두하는 일."

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이것이 외부적인 인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내면에서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심적인 혼란을 겪는다. 어쩌면 나도 지금이 그 상황이 아닌가? 그 상황에서의 "사물 관찰"은 멈춤이다. 
멈춤. 쉴 새 없이 달려가는 삶 속에서 자신의 방향이 맞는지 확인하고 무리하고 있지는 않는지 주변은 적절하게 보고 있는지, 조화롭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관찰"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인간은 두발로 서서 다니다고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오." 많은 인간이 고기나 양, 벌레나 거머리, 개미와 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한지를 당신도 잘 알 것이오. 물론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예감하고 부분적일망정 의식할 수 있게 될 때에만 비로소 그 가능성은 그들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나는 인간인가? 난 개미와 벌에 가까운 곤충이 아닌가? 나에게 주어진 일이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나아가는 내 모습은. 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목적을 생각하자. 그저 의미 없이 나 자신을 놀리지 말자. 주체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음악이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에 좋아한다." 도덕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 해도 타조가 되려 애써서는 안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옳거나 정의로운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때론 도덕적이지 않은 자유로움이 있을 때 더 자연스러워진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이 박쥐가 되었을 때, 때론 박쥐를 인정해주기도 해야 한다. 물론 매번 박쥐가 된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겠지만. 

 

 

나를 기쁘게 만든 것은 그의 학식이 아니라 정반대의 것이었다. "나 자신을 발견해 내는 일의 지속, 내 자신의 꿈과 사상과 예감에 대한 신뢰, 내가 지닌 내적인 힘에 대한 영롱한 자각" 때문이었다. 

지적 허영심으로 머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일어난 반응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삶 속에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을 채우는 방법이 아닐까? 껍데기를 만들지 말고. 안을 채우자. 안을 더 단단하게 만들자.

 

 

(크나우어) 때론 그가 귀찮아져 위압적으로 쫓아 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로 보내진 사람이었고, 내가 그에게 베풀어준 것이 그의 마음속에서 갑절이 되어 내게 되돌아왔으며, 그 역시 나에게는 한 사람의 인도자이고 하나의 길이라고 마음 깊이 느껴졌다. 

나에게로 보내진 사람. 분명 그런 사람이 있다. 내가 마음을 쓰고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 사람이 금방 나를 떠날 수도 있겠지만. 옆에 있다면. 마음을 다해 보살피고. 후회 없이 사랑하고. 떠날 때면 과감하게 보내주어야 한다. 

 

 

(피스토리우스) 누구에게나 사명은 있다 할 지라도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개인의 선택과 해석을 임의로 지배할 수 있는 사명은 없다는 깨달음이 날카로운 불꽃처럼 나를 불태웠다. 새로운 신을 원한다는 것은 잘못이었으며 이 세계에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었다.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견고히 하며, 그 길이 어디를 향하든지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 나가는 일. 그 이외의 다른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찾는 길. 난 이것에 죄책감을 가지기도 한다. 성경에는 희생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니까. 하지만 넌 신이 아니다.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스스로에게 너무 강박을 주지 말라. 스스로를 알아야. 제대로 된 배품이 가능하다. 많은 배품이 가능하다. 지속적인 배품이 가능하다. 

 

 

(싱클레어) "나"는 시를 짓기 위해서, 혹은 설교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임의의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데 있으며, 그 운명을 자신의 내부에서 송두리째, 그리고 온전하게 끝까지 지켜내는 일이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일부일 뿐이며, 도피하려는 노력이고, 대중의 이상 속에 숨으려는 행위인 동시에 순응하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는 자연의 실험체이다. 미지의 것, 어떤 새로운 것, 아마도 허무로부터의 도전일 것이었고 이 도박으로 하여금 본연의 깊이에서 작용하게 하고 그 의지를 나의 내부에서 느끼고 송두리째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만이 나의 사명인 것이다. 

나. 의 존재 이유는?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나의 운명, 나의 가치는 무엇인가? 
자연의 실험체라는 말.
불확실성에 대한 나의 의지적 대응이 필요하다. 

 

(데미안) 인간은 도망치고 있는 거야. 서로가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품으로 도망쳐 버리고 마는 거야, 즉 신사는 신사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학자는 학자끼리.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을 때 두려움을 느끼지. 게다가 결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지는 거야. 

확실히 그렇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면, 타인에게 도망치는 것조차 두려울 수 있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가장 선행돼야 할 것은 나 자신을 아는 것. 

 

 

(에바 부인) 그래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꿈을 발견해야 해요. 그리고 나면 그 길은 한층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어요. 또다시 새로운 꿈이 나타나게 되는 거지요.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그 꿈이 당신의 운명 인한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언제나 충실해야겠지요. 그리고 그것에 변함없이 충실하다면 언제 가는 당신 것이 될 거예요. 

우리 삶에서 꿈이란 어떤 것일까? 현실 안에서의 꿈이란. 불필요한 사치가 아닐까?. 치열하게 경쟁해서 남을 이기는데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그 "꿈" 이란 것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먹고살기에 급급한데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이 가치 있는 이유는. 삶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 꿈은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충실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발견해 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꿈에 대해 충실한 동시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

 

 

(싱클레어) 유럽은 온 세계를 얻었지만, 결국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싱클레어) 우리가 유일하게 의무로. 운명으로 느꼈던 것은 다만 각자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완전히 자기의 내부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가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온갖 일들에 대해서 스스로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느끼도록,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것뿐이다. 

 

(데미안) 지구 표면에 거대한 변혁이 일어나서 수서동물을 육지로, 육서 동물을 물속으로 밀어 넣었을 때, 그런 새롭고도 전대미문의 일을 수행하고 새로운 적응력을 통해 그들의 중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운명적으로 각오를 갖추고 있던 표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네. 그들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의 과정으로 넘어가면서도 자신의 종족을 구할 수 있었던 거야. 우린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네. 그래서 우리는 준비를 하려는 거야. 

특이점의 시대. 새로운 변화에 어떻게든 대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변화에 대한 적응은 어쩌면 지금 시대에 필수라고도 할 수 있다. 지식적인 부분만 습득하는 것을 넘어 영적인 부분도 함께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처럼 껍데기만 존재하고 영혼은 없어져 버릴 수 있으니까. 내가 변화에 대응해야지 보수적으로 현재의 삶의 지키던, 진보적으로 혁명을 일으키던 어떤 것이든 선택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에바 부인) 당신은 이 소원을 버리거나 아니면 완전하고 올바르게 바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당신이 그 소원을 성취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확신할 정도로 바랄 수 있다면 그땐 그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나 지금 당신은 소원하면서도 다시 후회하기도 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해요. 사랑을 구걸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요구해서도 안되지요. 자신의 내부에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은 끌려오는 게 아니라 끌어당기게 되는 거지요. 

 

(에바 부인 - 이야기) 그 아름다운 여자는 마침내 그를 따라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드디어 그녀가 왔고 그는 그녀를 자기에게 끌어당기기 위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여자가 그의 앞에 와 섰을 때 그녀는 아주 달라져 있었고, 그는 자기가 잃어버린 온 세계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겼음에 깊은 전율을 느끼고는 그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는 단순히 한 사람의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계를 그의 마음속에 지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들은 그의 내부에서 타올랐고 그의 영혼을 통해 환희의 불꽃을 튕겼다. 그는 사랑을 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에바 부인) 친애하는 싱클레어, 오늘 당신이 나를 불렀지요. 내가 직접 가지 않은 이유는 이미 잘 아실 거예요. 그러나 이걸 잊지 마세요. 당신은 이제 부르는 법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 언제든지 표적을 지닌 누군가가 필요하게 될 때는 꼭 다시 부르도록 하세요.  

사랑하는 한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온 세계를 자기에게 끌어당긴 것과 같은 환희를 느끼는 것 같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헌신을 통해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싱클레어)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새로운 인간성과 같은 그 무엇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 중 대다수가 내 옆에서 죽어갔지만 그들은 적에 대한 증오와 분노도, 살육과 파괴의 감정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적이란 그 목적과 마찬가지로 매우 우연한 것이었다. 가장 과격한 것조차도 본래의 감정은 적에 대해서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행동은 마음의 원에서 나오는 방사였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미쳐 날뛰고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어버리려는 내부에서 분열된 영혼의 발산에 불과한 것이었다. 거대한 한 마리의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우고 있는데, 그 알은 바로 이 세계였다. 따라서 이 세계는 산산조각 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싱클레어) 나는 열쇠를 발견했고, 때때로 어두운 거울 속, 운명의 형상이 잠들어 있는 그곳, 내 사진의 내면에 완전히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단지 그 어두운 거울위에 몸을 굽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완전히 그와 닮아 있던 나, 내 자신의 모습을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나를. 

나(me). 그(him). / 내면. 의식. 집중. 자유
자아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인도자이자, 친구이자, 아버지이자 어머니, 애인인 그들의 존재로 인해 자아는 만들어진다. 외부에서 내부로 시선을 돌릴 때 새로운 세상(세계)을 볼 수 있다.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야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작은 세계를 부수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그리고 세계가 완전히 부서졌을 때. 완성이 이루어진다. 

 

 

전반적인 데미안이란 소설의 문체는 역설적인 표현이 많다(그래서 좀 어려움). "남자와 같은 여자의 모습, 친근하면서도 접근하기 힘든, 어머니이면서 애인인 그녀의 모습" 등의 표현에서 아프락사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양 끝단에 있는 것들을 연결시켜 하나의 조화를 이루어 완벽한 절대 진리를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모습이 투영되기도 한다. 마치 "아프락사스"의 신처럼. 그리고 강력한 생각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관념도 곳곳에 묻어난다. 대표적인 예가 에바 부인이다. 물론 그 사랑은 육체적이거나 플라토닉적인 사랑에 국한되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온전히 마음을 다해 충실하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댓글